일본 조선업, 한때 세계를 지배한 산업이 쇠퇴한 이유

일본 조선업, 왜 망해가는지 궁금하신가요? 한때는 조선 강국이었는데 표준화와 생산설계 중심의 전략, 현장과 설계팀 간 단절, 숙련 인력 감소로 인해 점차 경쟁력을 상실해왔는데요.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시지 않나요?

일본 조선업 불황으로 고민하고 있는 일본인.

영국에서 일본으로: 세계 조선업 패권의 이동과 일본의 전성기

일본도 한때는 조선업으로 먹고살던 때가 있었는데 아셨나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전에 잠깐 보고 가시죠.

용접과 블록 공법으로 세계를 정복하다

조선업의 패권은 오랫동안 영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영국 조선업은 세계 최고의 기술과 생산력을 자랑했지만, 생산 방식에 있어 큰 한계가 있었어요.

당시 영국은 종이 도면에 설계를 한 후, 도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못(리벳)을 박아서 배를 만드는 방식을 고수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혁신적인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못(리벳) 대신 용접으로 철판을 붙이기 시작한 거죠. 한땀한땀 못으로 박는 게 아니라, 용접으로 주욱 붙여버리니 접합부위 강도가 높아지고, 건조 속도가 훨씬 빨라졌어요.

더불어 일본 조선업은 블록 공법도 도입했습니다. 도크에서 처음부터 배를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작은 블록으로 먼저 만든 후, 도크에서는 이것을 용접해서 조립하는 식으로 건조가 이뤄졌죠. 용접과 블록 공법이 합쳐지니 일본 조선업은 영국이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국도 이러한 혁신적 기술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노조의 강한 저항 때문에 신속하게 도입할 수 없었고, 결국 일반 상선 건조의 주도권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됐어요.

세계 조선강국으로 우뚝 선 일본

이런 과정을 거쳐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일반 상선을 포기하고, 크루즈선, 시추선, 심해 탐사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특화하게 됩니다. 반면 용접과 블록 공법을 전면적으로 도입한 일본은 세계 상선(벌크선, 탱커, 컨테이너선 등)의 60% 가까이를 건조하는 조선강국으로 우뚝 서게 됐어요. 일본 조선업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했죠.

그러나 1973년과 1978년에 발생한 1차와 2차 오일쇼크는 일본 조선업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해운 물동량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배가 남아돌기 시작했고, 일반 상선의 주문도 크게 줄어들게 됐어요. 이런 상황에서 한국 조선사들이 저가 수주 전략으로 시장 점유율을 늘리기 시작했고, 일본의 상선 수주는 절반 가까이 감소하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일본의 대응: 설계 자동화 & 표준화 전략

잘나가던 일본 조선업 실황이 망해가기 시작한 데에는 설계 자동화 및 표준화라는 나름 합리적으로 보이는 대응 방식이 한 몫을 했는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현장보다 설계에 승부를 걸다

한국의 저가 수주 공세에 맞서기 위해 일본은 ‘조선 합리화 정책’을 수립합니다. 이 정책에 따르면, 한국에 비해 현장직의 임금이 높은 것이 일본 조선업의 경쟁력 하락 원인으로 지목됐어요. 저임금을 무기로 하는 한국 조선사에 대응하기 위해 인건비 등 비용의 억제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죠.

하지만 일본은 현장인력의 임금을 바로 낮출 수 없었기 때문에, 설계 쪽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1960년대부터 일본에도 컴퓨터를 활용한 설계(CAD)와 제작(CAM)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이를 전면적으로 확대했어요. 컴퓨터를 활용하니 정밀한 설계가 가능해졌고, 선주의 설계 변경이나 맞춤형 요구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일본 조선사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듈식 설계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선체의 부품을 표준화하고 대량생산하여 품질을 높이는 전략이었죠.

일본 정부는 일본 조선사들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설계 부분을 강화해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는 방향을 잡았고, 초기에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일본 조선사들의 설계 부분 자동화는 성공적인 지식경영 사례로 널리 소개될 정도였어요.

생산설계의 도입과 현장-설계팀 간 단절

설계에서 성과를 확인한 일본은 설계를 더 강화하기 위해 ‘생산설계’라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게 됩니다. 기존에는 설계팀에서 기본 및 상세설계를 해서 현장에 전달하면, 현장인력들이 이 도면을 보고 배를 만들었어요. 일본은 여기에 생산설계라는 개념을 추가로 도입했는데, 이는 용접기술만 있으면 숙련된 현장인력이 아니더라도 설계도를 보고 배를 만들 수 있도록 디테일하게 설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생산설계가 정착되자 숙련된 현장인력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게 됐고, 현장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본사 설계팀의 영향력과 조직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이에 따라 일본 조선사들은 일본 최고학부 출신들에게 높은 연봉을 주며 입사를 유도했습니다. 또한 지방에 살기 싫어하는 최고학부 신입사원들을 유치하기 위해 설계팀에게 도쿄 사무실을 마련해 주기도 했죠.

그 결과, 설계는 도쿄에서 하고 생산은 지방에서 하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현장과 설계팀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생산설계가 정착되자 현장인력에 대한 수요도 바뀌기 시작했어요. 경험 많고 숙련되었지만 월급이 비싼 현장인력들보다 인건비가 저렴한 신입이 선호되기 시작한 것이죠.


일본 조선업 경쟁력 상실

일본 조선업 경쟁력이 완전히 상실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요. 특히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는 속도가 늦어지면서 이 현상이 가속화 되지 시작했어요.

표준화의 양날의 검

현장이 신입 위주로 채워지자 생산설계가 더욱 중요해졌고, 설계팀 조직은 계속 커져갔습니다. 그러나 일본 조선사들은 비대해진 설계조직으로 인한 비용 증가를 줄이기 위해 ‘표준화’를 도입하게 됩니다. 표준화는 한 척 한 척을 따로 설계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처럼 표준모델을 정해놓고 일부 옵션만 추가 설계하는 방식이었죠.

이렇게 일본 조선사에 표준화가 정착하게 되면서, 숙련된 현장인력에 이어 본사 설계팀의 필요성도 줄어들게 됐어요. 설계팀의 필요성이 줄어들자 우수인력 유치가 사라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 대학에 조선학과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업은 오랜 기간 경험이 쌓인 숙련된 현장인력이 필요한 산업인데, 일본의 경험 많은 현장인력들이 표준화와 생산설계로 인해 줄어들고 노령화되기 시작한 거죠.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지 못한 일본 조선업

이런 상황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상선의 유형이 다양해지고, 초대형 선박으로 커지기 시작했으며, 선주들의 요구도 까다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설계 조직을 줄이고 표준화를 추진했던 일본은 이러한 다양한 상선 수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게 됐어요. 설계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현장인력에서도 큰 문제가 발생했죠.

숙련된 현장 기술자들이 줄어들면서 복잡하고 고도화된 선박 건조에 필요한 기술력이 점차 약화되었고, 한국과 중국 같은 신흥 조선강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됐습니다. 표준화된 모델에만 집중하다 보니 맞춤형 선박이나 신기술이 적용된 선박에 대한 대응이 늦어졌고, 이는 곧 시장 점유율의 급격한 하락으로 이어졌어요.

또한 도쿄의 설계팀과 지방의 생산팀 사이의 단절로 인해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이나 개선사항이 설계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소통 부재는 설계 오류나 비효율적인 생산 프로세스로 이어졌고, 결국 일본 조선업의 경쟁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요인이 됐어요.

결과적으로 일본 조선업은 한때 세계 상선 건조량의 60%를 차지했던 최강국에서, 한국과 중국에 주도권을 내주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지나친 표준화와 자동화, 현장과 설계의 단절, 그리고 숙련 인력의 감소는 일본 조선업이 새로운 시장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어요. 이는 산업의 혁신과 변화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교훈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